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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역사

[의학의 역사] 해부가 죄였던 시대, 어떻게 시체를 구했을까?

오늘날에는 해부학을 당연한 의학 교육의 일부로 여깁니다. 하지만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해부는 '죄'였으며, 시신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금단의 물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해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교모하게, 때로는 극적으로 시신을 손에 넣었습니다. 오늘의 의학의 역사는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의학의 역사 시체도굴꾼

 

  • 시신은 신성했다 - 죄와 해부의 시작

중세 유럽에서 시신은 단순한 육체보다 그 이상의 가치였습니다. 기독교 교리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으며, 죽은 후 부활을 위해 시신이 온전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해부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로 여겨졌으며, 대대수 지역에서 시신 해부는 불경죄로 처벌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의학 교육은 갈레노스의 동물 해부에 의존했으며, '보지 않고 그리는 해부학'이 1,00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르네상스가 찾아오고,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가 부활하고, '인체를 직접 보는 것이 죄가 아니라 지식의 길'이라는 인식이 싹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신이 갑자기 넘쳐났을 리는 없습니다. 이때부터 의사와 해부학자들은 시신을 구하기 위한 지적 편법과 어두운 거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교수형 시체 - 해부실로 보내진 죄인들

르네상스 시기, 유럽 각국은 해부에 점점 더 관대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어 마땅한 자에 한해서' 였습니다. 정부는 사형수의 시신을 의과대학에 공급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공식적으로 교육 목적으로 합법적인 해부가 가능해진 첫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교수형으로 시체를 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1. 교수형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2. 모든 시신이 해부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3. 의사나 학생의 수에 비해 공급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공식적인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보너스 : 교수형 시체의 첫 공식 해부 - 볼로냐, 1315년

13세기 말, 당시 교황이었던 시식투스 4세는 노라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사형수의 시신에 한해, 교육 목적의 해부를 허용한다'는 교황령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1315년 이탈리아 보로냐에서 의사이자 교수였던 '문두니오 데 루치(Mondino de' Liuzzi)'가 사형당하 죄인의 시신을 앞에 두고, 공식 해부 강의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유럽 역사상 최초의 공인 해부학 수업이었습니다. 해당 수업은 라틴어로 진행되었고, 약 20명 남짓의 의과대학 학생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중세 시대 외우기만 했던 해부학 지식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중은 해부를 처벌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사형은 사회로부터 추방이라면, 해부는 몸으로부터의 추방이었습니다. 죄인의 몸이 해체되어 공개되는 것은 단순한 과학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상징적 제의로 작용했습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교수형 시신은 해부학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되었습니다. 많은 도시에서는 사형 선고와 동시에 '해부 예정'이 포함된 판견물이 내려졌고, 죄수는 죽기 전 자신이 해부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부 죄수는 나는 죽는 것보다 해부되는 것이 더 두렵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전해집니다. 

 

  • 해부학자의 어두운 동맹 : 도굴꾼의 시대

17~18세기 유럽에서는 시신을 훔피는 직업이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리서렉셔니스트(Resurrectionists)', 혹은 '바디 스내처(body snatcher)'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직역하면 바로 '부활시키는 자' 혹은 '시체 납치범' 입니다. 

 

그들은 장례가 끝난 직후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시신을 꺼낸 뒤, 다시 무덤을 복구하여 흔적을 지웠습니다. 그렇게 구한 시신을 의과대학이나 해부학 교수에게 현금 혹은 물품으로 거래했습니다. 해부학의 진보는 이 삽과 주머니칼을 든 무명의 도구굴꾼들의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 입니다. 

 

  • 의사와 도굴꾼의 공모 - 런던의 검은 거래

가장 악명높은 시체도굴꾼 사례는 19세기 초 런던에서 일어난 '버크와 헤어 사건' 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도굴꾼이 아니었습니다. 버크와 헤어는 이민자였으며 가난했습니다. 헤어는 에든버러의 하숙집을 운영 중이었고, 버크는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숙객 중 한 명이 병사하게 되는데, 이때 그들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시신을 그냥 묻을 필요가 있을까? - 의사에게 팔 수는 없을가?'

 

그들은 시신을 가방에 넣고 에든버러의 의과대학으로 향했고, 해부학자 로버트 녹스의 조수들에게 시신을 넘겼습니다. 그때 대가로 받은 돈은 7파운드 10실링, 당시에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시체를 훔쳤지만, 나중에 시체가 부족해지자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버크와 헤어는 가난한 노인, 병자, 정신장애인 등의 사회적 약자들을 집에 유인해 질식시킨 뒤, 그들의 시신을 유명한 해부학자 로버트 녹스에게 넘겼습니다. 녹스는 시신을 공급받는 대신, 범행을 묵인하거나 눈 감았다는 의혹을 받습니다. 이렇게 살해된 희생자는 총 16명, 모두 10개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 두사람이 범행은 결국 덜미가 잡혔습니다. 그들이 살해한 마지막 피해자, '마거릿 도허티'의 실종을 수상하게 여긴 이웃이 신고했으며 경찰이 하숙집을 수색하면서 시신을 침대 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헤어는 검찰과 거래하여 버크를 고발하는 대가로 면죄부를 받았고, 버크는 1829년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버크는 죽은뒤 해부당했으며, 그 해부 장면은 공개 강의로 진행되었으며 이때 에든버러의 전역에서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고 전해집니다.

 

  • 해부는 죄였는가? 아니면 진리의 비용이었는가

오늘날 우리는 의과대학에서 인체 해부를 배우는 것을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윤리적 충돌, 사회적 편견, 그리고 음지의 거래가 있었습니다. 해부학은 단순한 과학이 아닌, 신념과 규범을 뒤흔드는 철학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아이러니 한 점은, 해부를 금지하던 시대가 오히려 해부의 필요성을 더 절박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지식을 갈망하던 사람들은 법과 종교의 벽을 넘어, 때로는 어둠 속에서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 마치며 : 무덤에서 시작된 의학
인체는 죽은 뒤에도 말한다.

 

해부학자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시신은 단지 육체가 아니라, 지식의 문을 여는 열쇠 였습니다.해부학이 죄였던 시대, 사람들은 스승이 아닌 시체에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배움은 결국 살아있는 우리 모두의 생명을 지키는 지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해부학을 시작한 이들이 무덤에서 꺼낸 진실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