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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역사

[의학의 역사]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와 근대 해부학의 탄생

중세를 넘어 르네상스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의학의 역사에서도 르네상스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합니다. 르네상스의 정신은 예술을 꽃 피웠고, 철학을 되살렸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다시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병원 안, 해부대 위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의학의 역사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근대해부학의 역사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는 바로 그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1543년 발표한 [인체구조에 대하여]는 단순한 해부학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권위를 넘은 관찰의 기록이자, 근대 의학의 출발선 이었습니다.

 

  • '본 적 없는 해부학'을 배워야 했던 시대

15세기 유럽, 의과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가장 먼저 외우는 이름은 '갈레노스(Galen)'이었습니다. 그는 2세기 로마 제국 시절의 의사이자 해부학자였습니다. 문제는 그가 해부한 대상이 사람이 아닌 동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갈레노스의 의학이론은 약 1,300여년 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의사들은 그저 책을 암기했고, 직접 시신을 해부해보는 일은 당시 신성모독으로 여겨졌기에 이론상으로만 습득해야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금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법과 문화는 시신을 '하늘의 질서'로 간주했습니다. 교육 목적으로라도 해부를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의학은 '보지 않고 믿는 학문'이 되었습니다.

 

  • 젊은 베살리우스, 시신을 보다

해부학이 신성모독으로 여겨지는 당시, 16세기 초 브뤼셀에서 태어난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 - 1564)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루뱅대학교와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이탈리아 파두아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파당시 파두아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시신의 해부가 공식적으로 허용된 유일한 곳 이었습니다.

 

베실리우스는 강의실이 아닌 해부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직접 시신을 해부하며 갈레노스의 주장이 실제 인체아 얼마나 다른지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하악골(턱뼈)'입니다. 갈레노스는 인간의 턱뼈가 두개라고 설명했지만, 실제 인간의 해부결과 턱뼈는 단 하나의 뼈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심장 판막의 방향, 간의 위치, 혈관 구조 역시 수많은 오류가 드러났습니다. 이때 그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진리는 책이 아닌, 인간의 몸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 [인체구조에 대하여] - 몸으로 쓴 혁명 선언문

1543년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그의 인생 대표작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바로 [De humani corporis fabrica libri septem(인체구조에 대하여, 7권) 입니다. 이 책은 단순한 해부 도감을 넘어서, 의학 혁명의 기점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총 7권,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
  2. 200점 이상의 정밀한 목판화 해부도 삽화
  3. 갈레노스 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
  4. 철학과 해부학, 예술이 하나가 된 구성

그의 해부도는 단순히 근육과 뼈를 나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생동감을 담은 해부된 신체가 자연 풍경 속에 서있거나, 관찰자의 시선을 의식하듯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언뜻 들으면 소름끼치는 모습일 수 있지만, 이는 르네상스 회화의 영향이며, 동시에 '몸은 단순한 기계까 아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메시지 였습니다. 

 

  • 그림을 톻해 본다 - 해부학 교육의 새로운 기준

베살리우스 이전의 해부학 교육은 이론 중심, 구두 전달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체 구조에 대하여]는 의학 교육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그의 책의 삽화를 통해 직접 그림을 보며, 해부 장면을 따라 그리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더욱 생동감있는 지식을 습득하였습니다. 이는 현대 해부학 교과서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하며, 안드레아스의 책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의과대학에서 해부학 교육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해부된 근육을 보여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람의 감정과 자세까지 담아냈습니다. 해부된 채 서있는 사람, 자연 풍경 속에서 몸을 드러낸 인물들을 그렸습니다. 또한 그는 시신을 단순한 해부 대상이 아닌, 학문적 존중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책 전체에서 시신을 다루는 태도는 예의와 존경을 잃지 않았으며, 인체를 통해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성찰을 유도했습니다.

 

  • 비판과 박해, 그리고 조용한 퇴장

베살리우스의 등장은 보수적인 의학계에 충격을 안겼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이단아로 몰았고, 심지어 교회에서는 그가 신의 창조물에 칼을 댔다는 이유로 고발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보수적인 학자들과 종교 권력은 그를 '교만한 젊은이'라고 불렀으며 그가 신의 질서를 해친다고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궁정의사로 초빙되며, 학계의 직접적인 박해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지만 학문적 고립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후속 연구를 이어가기 어려웠고, 그의 해부 연구는 자연스럽게 중단되었습니다. 

 

1564년 그는 베살리우스는 성지순례를 떠난 도중, 그리스 자킨토스 섬에서 병사하였습니다. 그는 50세가 되기 전에 생을 마쳤지만, 그의 인체구조에 대하여는 이후 최소 300년 넘는 시간 동안 의학 교육의 핵심 교재로 자리 잡았고, 그의 방식은 현대 의학의 정석이 되었습니다. 

 

  • 권위에서 관찰로, 어두운 방에서 환하게 밝혀진 인체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시대의 틈을 꿰뚫은 '관찰자'였습니다. 그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면, 먼저 사람의 몸을 보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믿음이 아닌 검증, 암기보다 관찰, 권위가 아닌 근거. 이 모든 전환은 베살리우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짧았지만, 인체구조에 대하여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의학의 교과서로 남아있습니다. 해부학 수업 첫 시간, 한장의 그림을 마주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그 그릠속에는 분명 베살리우스 눈이 함께 담겨 있을 것 입니다.

 

진리는 텍스트에 있지 않다. 나는 본 것만 믿는다.
-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