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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역사

[의학의 역사] 마취의 발견 :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의 치열했던 경쟁

고통 없는 수술,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이 개념은 인류 역사 대부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칼이 몸을 가를 때, 환자는 정신이 깨어 있었고, 수술대 위는 울부짖음과 절규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류는 고통을 잠재우는 마법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법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 마취 이전의 수술 : 고통이라는 공포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수술은 속도와 기술의 싸움이었습니다. 외과의사는 가능한 한 빠르게 절단하거나 절개해야했습니다. 그때 환자는 마취 없이, 깨어 있는 상태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수술대에 묶인 채 울부짖는 환자들,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손을 떨던 외과의사들, 수술이 끝나도 과다출혈이나 쇼크로 죽어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수술은 고문과 같았습니다.

 

보너스 : 손보다 빠른 칼 - 로버트 리스턴의 전설

19세기 초, 영국 외과의사 '로버트 리스턴(Robert Liston)'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외과의사로 명서을 날렸습니다. 당시 마취가 없던 시대, 수술의 속도가 생사를 갈랐습니다. 리스턴은 다리 절단수술을 2분 이내에 끝낼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칼을 번개처럼 휘둘렀지만, 속도에 집착하다 벌어진 사건도 있씁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3초 전단술 사고'입니다. 그는 한 환자의 다리를 절단하는 동시에 환자, 조수 그리고 참관하던 교수의 손가락까지 잘라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두 감염으로 사망하면서 '외과 수술 역사상 유일한 300% 사망률'이라는 전설이 탄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준으로는 리스턴이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마취가 보급된 이후, 리스턴은 '이제 속도보다 정확성의 시대가 왔다'라며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고통 없는 수술을 위한 처절한 노력'을 상징합니다.

 

  • 에테르 : 처음으로 고통을 잠재운 물질

1846년 10월 16일, 미국 보스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한 청년이 턱에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치과의사 윌리엄 모턴은 환자에게 무색무취의 기체를 마시게 한 뒤, 환자가 깊은 잠에 빠진것을 확인하고 외과의사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환자는 고통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물질은 바로 '에테르(Ether)' 입니다. 에테르는 빠르게 작용하고, 깊은 마취 상태를 유도할 수 있어 '수술에서 고통을 제거한 최초의 물질'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에테르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에테르는 강력했지만, 문제점도 분명했습니다.

  1. 인화성이 매우 높아, 수술실에서 화재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
  2. 흡입 과정에서 환자가 기침하거나 구토하는 부작용이 있다.
  3. 과량 투여 시 심각한 호흡 억제를 초래할 수 있다.

초기의 마취는 과학보다 경험에 의존했습니다. 적정략을 찾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고, 초기 마취는 성공보다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마취제가 등장했습니다.

 

  • 클로로포름 : 더 부드러운 마법

1847년, 스코틀랜드의 산부인과 의사 '제임스 심프슨(James Young Simpson)'은 더 안전하고 부드러운 마취제를 찾고자 다양한 화학물질을 실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클로로포름(Chloroform) 이빈다. 클로로포름은 에테르보다 냄새가 순하고, 환자가 쉽게 흡입할 수 있으며, 빠르고 깊게 마취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심프슨은 직접 친구들과 함게 클로로포름을 흡입하며 실험했습니다. 그 결과, 클로로포름의 효과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1853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여덟 번째 아이를 출산할 때 클로로포름으로 마취를 받았습니다. 영국 왕실이 클로로포름을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알려졌지면서 '고귀한 약'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의료계에 새로운 표즌으로 자리잡게되었습니다. 클로로포름의 등장은 '고통 없는 출산과 수술'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의 그림자

그러나 클로로포름 역시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과다 흡입 시 심장 박동을 억제하여 '급사'를 유발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어린이나 심장 질환 환자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반대로 에테르는 더 많은 부작용이 있었지만, 급사의 위험은 클로포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덕분에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에테르를 선호했고, 유럽은 클로로포름을 선호하는 '마취제 양분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의학의 역사 마취제의 발견

마취제 시음회, 의사들이 낄낄대던 밤

 

에테르와 클로로포름 초기에는 안정성 테스트를 별다른 장비 없이 진행했습니다. 심지어 일부 의과대학에서는 학생과 교수들이 모여 '마취제 시음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 다양한 약품을 늘어놓고, 서로 조금씩 들이마시며 '이건 기분이 너무 좋아;, '이건 토할 것 같아' 등의 평가를 했다는 겁입니다. 

 

덕분에 당시 많은 의사들은 약품의 진짜 위험성을 체험하기도 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아찔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과학과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무모함이 교차하던 시대의 모습입니다.

 

  • 마취는 어떻게 대중의 일상이 되었나?

초기에 마취는 부자와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처럼 여겨졌습니다. 점차 농민 , 노동자 등 일반 서민층에도 마취가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노동 사고가 많아지면서, 응급 수술에 마취제가 필수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한 병원에서는 클로로포름 흡입을 거부한 노동자가, 수술 도중 참다 못해 스스로 기절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마취는 단순한 고통 제거가 아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방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는 '고통 없는 수술'이라는 광고 문구가 등장해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의학 잡지에는 에테르 마취 중 환자가 이상한 노래를 부르거나, 꿈을 꿨다는 귀여운 일화들도 종종 실렸습니다. 이처럼 마취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줄이고, 수술을 '살 수 있는 기회'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마취의 보급은 근대 외과 수술의 폭발적 발전을 가능하게 만든 발판이 되었습니다.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의 보급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위험, 실패, 죽음을 동반했지만 그 용기와 도전 없이는 오늘날의 안전한 마취학도 존재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교한 마취과 전문의와 다양한 약품 덕분에 수술대 위에서도 안전하게 잠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