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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역사

[의학의 역사] 약초와 마녀 사이 : 치유와 단죄가 얽힌 중세의 그림자

 

16세기 유럽의 한 시골 마을. 조용히 들판에서 쑥과 마늘을 캐던 노파는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약초를 넣고 우립니다. 그것은 아이의 열을 내리기 위한 전통적인 요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이웃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조용히 풀을 뜯어 밤마다 풀을 삶는 저 여인은 마녀가 분명하다!' 그렇게 그녀는 다음 해 봄, 마을 광장에 불태워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것은 단지 몇 줄기 약초의 향기와, 아무도 고쳐주지 못했던 병을 낫게 했다는 무성한 소문 뿐이었습니다.

 

의학의 역사 중세의 약초와 마녀

 

이렇듯 중세 유럽에서는 약초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식이자 권력,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여성이라는 신분, 교회라는 체제, 그리고 '마녀'라는 이름아래 폭발적으로 얽히고 의학의 역사 속 힘약한 여성들의 슬픈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 자연에서 찾은 치료법, 두려움의 씨앗이 되다

약초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생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고대부터 인간은 식물을 통해 질병을 치료해왔으며, 이른바 본초학이라고 불리는 약초학은 기원전 수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중국, 그리스 등지에서 이미 정립되고 있었다. 유럽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며, 로마 시대부터 갈렌이나 디오스코리데스 같은 인물들이 약초에 대한 체계적 분류를 시도했습니다. 수도원 의사들이 식물의 성질을 기록하고 정리하면서 약초학의 기반을 차곡히 쌓아올렸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곧 두갈래로 나뉘게됩니다. 하나는 라틴어로 쓰인 공식 의학서에 기초한 남성 중심의 학문, 다른 하나는 마을이나 공동체 중심의  민간요법으로 입에서 입으로 어르신들의 지혜로 전승된 구술 문화였습니다. 후자는 대부분 여성들에 의해 이어졌고, 약초의 사용법도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이 여성들은 의사는 아니었지만,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은 그들을 찾았고, 공동체는 약초를 활용해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교회와 귀족 중심의 권력은, 구술로 전해지던 약초학을 자신들이 통제 할  수 없는 지식으로 보고 위험요소로 간주했습니다.이들의 지식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질병을 고쳤다는 사실은 중세시대에서는 '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해석되어 이 위험요소는 언제나 힘 없는 이들을 타겟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 마녀사냥, 질병과 불안이 만든 사회적 해소구

중세 말기 유럽은 전쟁, 기근, 흑사병  등으로 끊임없이 고통받았습니다. 14세기부터는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앗아가 죽음과 혼돈이 일상이 된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공포를 외부로 투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보이지 않는 힘을 다루는 자'로 여성치유자들에게 화살이 돌아갔습니다. 

 

이 당시 대부분 수도원에서 치료진 의료행위와는 별개로 마을에 구전으로 전해오던 지식으로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진 여성은 이중적인 존재로 비쳤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존재, 그러나 동시에 '악마와 거래한 자'라는 낙인이 붙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악마의 음로'를 이야기했고, 약초로 병을 고친다는 것은 중세시대에는 자연의 법칙을 거슬렀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고, 이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1487년, 독일 도미니크 수도사 크라머와 슈프렌거가 출간한 <마녀망치>는 이 흐름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 책은 여성의 약초 사용이 어떻게 '악마의 계약'으로 이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했습니다. 이때 지목된 마녀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들고있던 약초 상자 하나, 마른 뿌리 몇 개 그리고 몇번의 치료 경험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때 생명을 살리던 손은, 단지 기존의 권력이 견제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제거되었습니다.

 

  • 중세 법정에 선 약초 지식

기록에 따르면, 15세기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는 한 여성이 민간 치료법으로 열병을 완치한 후,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닌 악마와 함께 속임수를 쓴 것'이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했습니다. 실제로 기록으로 살펴본 결과, 많은 여성들이 마녀로 몰릴 때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치료의 성공이었습니다. '죽어가던 아이를 고쳤다, 3일 밤낮 끙끙 앓던 환자가 그녀의 차를 마시고 나았다'와 같은 사례가 오히려 불가능한 치유는 악마의 힘이라는 논리에 따라 마녀재반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남부에서는 민간 약초를 팔던 시장이 폐쇄되고, 주민 17명이 마녀로 몰려 체포된 일도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미신이 아닌, 당시 사회과 지식과 권위를 어떻게 통제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마녀사냥은 결국 비공식적인 지식과 공식 권력의 충돌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 사라진 지식, 그리고 남겨진 상처

마녀사냥은 단순한 인적 희생으로만 볼 순 없습니다. 수백 년간 전해 내려오던 식물학 지식, 지역별 치료 전통, 여성 중심의 의료 문화는 공포 속에서 침묵하거나 단절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약초학의 계보는 학문이 아니라 불에 타는 혐의의 증거로 남았고, 자연과의 조화는 '이단적 사고'로 간주되었습니다.

 

근대 의학이 발달하면서 약초학은 다시 '과학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은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이는 단지 성차별이 아닌, 지식 구조 자체가 남성 중심으로 재편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과거 마녀엿던 이들의 자리는 이제 의사 가운 혹은 약사 가운을 입은 남성이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약초학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인간을 살려온 그 지식이, 과거에는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윤리적 질문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어떤 지식이 위험해지는 순간은, 그것이 틀려서가 아닌 '누가 그것을 말하느냐'에 달려 있을 때입니다.

 

보너스 : 독일 뷔르츠부르크 마녀재판 - 악몽이 된 900일

1626년부터 1629일까지,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는 유럽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마녀재판 중 하나가 벌어졌습니다. 단 3년의 시간동안 약 900명이 마녀 또는 마법사로 몰려 처형되었으며, 그 중에서는 7세 소녀부터 고위 성직자, 심지어 판사의 부인까지 포함되었습니다.

재판은 처음 작은 시골 마을의 '치유 능력을 가진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고문과 밀고가 반복되면서 피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람들은 재판이 끝 무렵엔 스스로가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믿지 못했습니다. 이 재판은 단지 마녀사냥이 아닌, 공포가 만들어낸 집단 히스테리이자, 권력이 지식과 소문을 통제한 끔찍한 사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