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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역사

[의학의 역사] 의사가 아니었던 사람들, 의학을 바꾸다 - 독학자들의 위대한 기여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의학은 오랜 시간 엘리트의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계를 넘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의학 교과서를 배우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깊게 '인간의 몸'을 생각하며 궁금해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고전 교육도, 면허도 없었지만 시대를 바꿨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의학은 이제 '누구의 지식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의학의 역사 의사가 아니었던 사람들

 

  • 바버 서전과 골목 외과의사 - 면허 없는 전문가들

르네상스가 막을 내리고 유럽이 근대로 접어들 무렵, 의사는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첫째는 라틴어로 진단을 내리는 학자형 의사, 둘째 직접 피를 흘리며 수술을 했던 '바버 서전(barber-surgeon), 이발사 겸 외과의사였습니다. 

 

후자의 경우 정식 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제식으로 기술을 익혔고, 칼을 들고 사람을 수술하는 기술자에 가까웠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 외과(surgery)라는 단어의 어원이 바로 이 '서전(surgeon)'에서 왔다는 것 입니다. 학문이 아닌 실습에서 시작된 의술이 실질적인 의학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 제너, 우두를 바른 농부 - 백신의 탄생은 '현장'에서

1796년 영국의 작은 시골마을 글로스터셔에서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라는 시골의사가 이상한 실험을 했습니다. 우두(cowpox)에 걸린 소젖 짜는 여성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8살 소년 제임스 피프스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어린 소년의 팔에 칼로 상처를 내고 우두 고름을 발라 접종한 것입니다. 그 뒤 천영두 병원체를 소년에게 노출시켰지만, 그 소년은 천연두에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이 실험은 동의서도 없고, 의학 윤리도 없어서 경악할 정도로 무모해 보이지만, 그 결과는 대 성공이었습니다. 소년은 천연두에 감염되지 않았고, 인류 역사상 첫 번째 백신(vaccine)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백신이라는 단어가 소를 뜻하는 라틴어 vacca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실 제너는 정식 의사이긴 했지만, 그의 이론은 논문보다 '농민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백신은 실험실이 아닌 들판에서, 교수가 아닌 소젖짜는 여성의 경험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 파스퇴르, 화학자가 만든 의학의 기적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원래 미생물학자가 아니라 화학자 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병원밖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졌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 질병의 원인일 수 있다'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와인과 맥주가 왜 쉽게 상하는지를 연구하다가, 공기 속 보이지 않는 생명체(세균)가 부패의 원인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증명하기 위해 직접 실험을 했습니다. 유리 플라스크에 끓인 육수를 넣고 공기를 차단하면, 며칠이 지나도 썩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이 유리 플라스크에 공기를 통하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썪기 시작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의사들이 믿던 '자연발생설'을 뒤집는 결정적 증거였습니다.

 

또한 그는 광견병 백신을 개발할 당시, 감염된 소년에게 백신을 처음 투어하며 손을 떨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실험은 성공했으며, 그는 단번에 '죽음을 막은 화학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파스퇴르, 그는 백신, 살균, 소독법, 예방의학 등 현대 감염병 관리의 토대를 세운 과학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병원 병동에, 우유병 위에, 실험실 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 셈멜바이스, 손 씻는 남자 - 의사보다 집요했던 산부인과 독학자

헝가리의 산부인과 의사 '이그나츠 셈멜바이스(Ignaz Semmelweise)는 산욕열로 죽는 산모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그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 의사들의 손이 감염을 퍼뜨린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해결책은 간단했습니다.

의사들에게 해부실에서 병동으로 갈 때 반드시 손을 씻게 할 것

 

그 결과 사망률은 눈에 띄게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롱받고, 결국 정신병원에 갇혀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가장 큰 반발을 한 이들은 의사들 이었습니다. 오히려 비의학적 방법론이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 미국 흑인 빈민가 출신의 비의사 수술가 : 비비안 토마스

의학의 역사 르네상스 시절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국의 유명한 비의사 수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로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960년대, 미국 흑인 빈민가 출신의 비의사 수술가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식 의학 교육은 없었고 토마스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하다가 외과의사 알프레드 블락(Alfred Blalock)의 눈에 띄었고, 그의 조수로 일하면서 청색증(Blue Baby Syndrome) 우리나라 말로는 심장판막 수술의 핵심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백인 의사들은 그를 '수술실의 영웅'이라 불렀습니다.

 

정작 수술실에서는 '의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칼을 잡을 수 없었지만, 대신 수술실 뒤편에서 의사들에게 손짓으로 정확한 수술 경로를 지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미국 내 심장외과 분야의 중요한 발전은 그의 손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십 년 뒤, 존스 홉킨스 병원은 비비안 토마스를 명에 박사로 추대하며 '우리가 먼저 박수를 보냈어야 할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의사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의학의 미래를 앞서 있었습니다.

 

  • 의학의 역사에서 자격증보다 중요한 것

의학은 전문 영역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의사의 면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몸에 대한 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의사가 아니었던 사람들의 손에서 예방, 소독, 백신, 수술 기술, 감염 통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의사가 아니었지만 '몸'을 두려워하지 않고,'죽음'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묻게 됩니다. '의학은 누구의 지식이어야 하는가?'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