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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역사

[의학의 역사] 심장을 그린 남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몰래 시신을 해부하다

우리에게 지금도 널리 알려진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는 하늘을 나는 기계를 그렸고, 세계에서 가장 신비로운 미소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hi , 1452-1519)의 가장 위대한 그림은, 화폭이 아닌 시신 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해부도를 그린 예술가이자, 생명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 철학자였습니다. 천재로 알려진 레오나르도다빈치 우리가 잊고있던 그의 의학적 역사를 같이 들여다보자!

 

  • 해부학을 그린 예술가, 혹은 예술을 해부한 철학자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 사상이 본젹적으로 피어난 시기였습니다. 종교와 신 중심 세계관이 서서히 물러나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탐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우리의 천재 다 빈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같은 작품 뒤에는 놀라운 과학적 호기심과 실험 정신이 숨어있습니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 인체를 해부한 것이 아닌, 인간이란 존재의 진실을 그림으로써 탐구하려고 했습니다. 예술가의 눈, 과학자의 손, 철학자의 사고 그 모든것이 한 사람안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 금기의 영역을 넘어서 : 해부실 속의 다 빈치

당시 유럽에서 인체 해부는 여전히 종교적 금기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15세기 말 ~ 16세기 초 유럽에서는 인체 해부가 법적으로도 거의 금지된 행위였습니다. 교회는 시신을 신성한 존재라고 여겼고, 이를 해부하는 것은 '신의 창조물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다빈치는 그런 금기를 넘어섰습니다. 처음에는 미술적 호기심으로 시신을 관찰하기 시작했지만, 이내 인간 내부 구조에 대한 깊은 지적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밀라노 병원,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 또는 시신처리장 등에서 몰래 시신을 얻거나 관계자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해부를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그는 밤중에 조용히 병원 지하의 해부실로 들어가 시신을 해부했고, 양초 불빛 아래에서 스케치를 남겼다고 알전해집니다.

 

  • 비밀 노트, 그리고 좌우 반전 글씨로 봉인된 지식

다빈치의 해부 기록은 모두 자신의 비밀 노트에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부 기록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라고 추측됩니다. 해부학이 종교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지닌 당대의 의학 수준보다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이 기록들을 좌우 반전된 거울 글씨로 남겼다는 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1. 비밀 유지 : 교회나 정치적 권력이 자신의 연구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
  2. 왼손잡이의 습관 :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왼손잡이였으며, 왼손으로 글씨를 쓸 때 잉크가 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반대로 글을 썼다는 설

어쨌든, 그는 그 누구에게도 해부 결과나 스케치를 쉽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좌우반전의 글씨는 외부의 시선으로 부터 내용을 숨기기 위한 비밀 보호 수단이었다는 해석도 있스빈다. 30구 이상의 시신을 해부하여, 약 1,300개의 해부 스케치를 남겼습니다만, 그의 해부학 스케치는 300년 이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 했습니다. 그의 해부학 기록은 사망 이후 후계자의 손을 거쳐 런던, 윈저성의 왕실 컬렉션에 봉인되었고, 19세기 말에서야 처음으로 일부가 공개되었습니다.

 

당시 의학계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밀로 부쳤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신 스케치에는 근육과 골격, 신경, 혈관, 장기 등 인체의 거의 모든 구조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심장, 폐, 생식기 심지어 임산부의 자궁과 태아까지도 놀라운 정밀도로 묘사되어있습니다. 이 중 일부는 수백년 후에야 다시 입증할 수 있던 수준이었습니다.

 

의학의 역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해부학

  • 태아와 자궁, 생명의 신비를 기록하다

그의 스케치 중 가장 상징적인 그림 중 하나는 자궁안의 태아 입니다. 그는 임산부의 시신을 해부하여 자궁 구조를 관찰했으며, 그 안에 존재하는 태아의 모습을 정밀하게 그렸습니다. 오늘날 발전한 초음파 기술 이전의 시대에 이렇게 정확한 태아 묘사가 가능했던 것은, 다 빈치가 얼마나 치밀하게 관찰했고, 얼마나 깊은 경외심으로 생명을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로는 상상할 수도 없었떤 이 그림은 단지 해부학적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다빈치는 태아의 형태뿐 아니라, 생명이 형성되는 과정을 경외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그의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이 작은 존재가, 우주의 가장 복잡한 기계로 성장한다.

 

이 짧은 문장은 그는 해부학이 단순한 과학적 탐구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였음을 증명합니다.

 

  • 심장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 중 한 명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다 빈치의 심장 해부 스케치입니다. 그는 소의 심장을 해부하고 관찰하면서, 심장이 단지 뜨거운 감정의 상징이 아니라 '혈액을 움직이는 기계적 펌프'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의 노트에는 심장의 판막 구조, 혈류 방향, 수축과 이완 주기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다 빈치가 이 정보를 정리한 시점이 16세기 초반이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유럽 의학계에서 혈액 순환 이론이 정립된 것은 1628년, 윌리엄 하비에 의해 발표되었으며, 그보다 100년 이상 앞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당시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너무 앞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의사가 되지 못한, 가장 위대한 해부학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단 한명의 환자도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면허를 지닌 의사도, 해부학 교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기록은 인간을 이해하려 했던 가장 집요하고 아름다운 시도였습니다. 그의 해부학은 과학이 아닌 예술처럼, 예술이 아닌 철학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가 해부한 것은 단지 인체가 아니라, 인간 존잰의 비밀 그 자체였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의사들은 다 빈치의 해부 노트를 보면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의사가 되지 않았지만, 의사들이 가장 존경하는 더 나아가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보너스 : 다빈치의 죽음

다빈치는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말년까지도 다양한 주제에 대해 메모와 그림을 남겼지만, 손의 마비로 인해 점차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는 왼손잡이었으며, 마지막 기록에는 손이 굳어가는 모습을 아까워하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의학적으로는 뇌졸중이나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는 그가 말년에 손의 마비를 경험했다는 증거와도 맞아 떨어집니다.

다빈치는 이미 삶의 대부분을 예술과 과학, 철학의 경계 위에서 치열하게 살았으며, 말년에는 프랑수아 1세 왕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이주해 그 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는 프랑스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림에도 묘사되어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장면이 상징적 표현일 가능성이 크지만, 중요한 건 그만큼 다빈치가 존경과 애정 속에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