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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역사

[의학의 역사] 흑사병의 대유행, 그리고 유럽 인구의 붕괴 : 전염병이 뒤바꾼 중세의 풍경

14세기 중반, 유럽 전역을 덮친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 재앙은 단지 전염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존 방식을 바꾸고, 인구 구조를 붕괴시키고, 심지어 봉건제와 종교 질서까지 흔들어 놓은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흑사병(Black Death) 오늘날 '페스트'로 알려진 이 질병은 단기간에 유럽 인구의 절반 가까이 혹은 3분의 1 이상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수백년에 걸쳐 유럽 사회를 재편시켰습니다. 오늘의 의학의 역사는 흑사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의학의 역사 : 중세의 흑사병

 

오늘날 '페스트'로 알려진 이 질병은 단기간에 유럽 인구의 절반 가까이 혹은 3분의 1 이상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수백년에 걸쳐 유럽 사회를 재편시켰습니다. 

 

  • 흑사병의 시작

흑사병은 1347년, 크림 반도의 도시 카파(Caffa)에서 처음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당시 이 지역은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의 주요 교역항이었으며, 몽골 제국의 통제 아래 동서 교류의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상인들은 제노바로 돌아오면서 감염을 확산시켰고, 이내 프랑스, 영국, 독일, 스칸디나이바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네트워크를 타고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몽골군은 카파를 포위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병사 시신을 성벽 안으로 던졌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초보적 형태의 생물학적 전쟁으로도 여겨지는데, 이 시점에서 전염은 상인들과 해상무역을 통해 지중해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이탈리아 제노바로 귀한환 선박들은 항구에 정박한 직후 병사하거나 죽어 있는 선원들을 발견했으며, 이에 대한 공포는 순식간에 유럽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페스트군의 원인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로 밝혀진 박테리아 였습니다. 주로 벼룩에 감염된 쥐가 매개체였지만, 당시 도시의 환경은 이들이 번식하기에 이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좁고 밀집된 주거지, 오물과 쓰레기가 가득한 거리, 사람과 동물이 혼재하는 생활 때문에 이후에는 사람 간 전염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초반에는 쥐를 통한 전파가 대부분이었으마, 이후 공기 전염이 가능한 폐페스트로 진화했으며 사람 간 감염도 가속화되었습니다. 갑작스런 고열과 오한, 통증을 동반한 림프절 종창, 피부 흑변 등 치명적인 증상이 며칠 만에 나타났고, 치료법이 전무했던 시기 그리고 병의 전염 감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률은 60~90%에 이르렀습니다.

 

  • 인구의 절반이 사라지다

1347년부터 1352년까지 단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유럽은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잃는 초유의 재앙을 겪었습니다. 학자마다 수치는 다르지만 유럽 인구는 흑사병 발병 전 약 8,0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 중 최소 3,000만~5,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을거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단, 5년 만에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한 통계가 아닌, 도시와 마을이 텅 비고, 일할 사람이 없응 우리 코로나19시대보다 더 심한 일상 자체가 멈추는 재앙이었습니다. 

 

특히 인구간 밀접도가 낮은 시골보다 밀접도가 높은 도시의 상황은 더 심각했습니다. 밀집된 인구 구조와 비위생적인 환경이 페스트 확산을 폭발적으로 가속시켰고, 일상적인 사망이 반복되며 사람들은 가족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방치되는 상황을 겪어야 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마을 전체가 사라지거나, 도시 인구의 70% 이상이 죽어갔다는 증언도 남아있습니다. 시체를 묻을 인력조차 부족해 집단 매장이 이어졌고, 종종 시신은 방치되거나 불태워졌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두려워하며 타인을 회피하게 되었으며, 시장 등의 사람간 교류는 멈췄고, 학교도 닫혔으며, 종교의 의식조차 중단되었습니다.

 

  • 사회 구조의 균열과 변혁

인구의 절반이 사라지자, 노동력 역시 급격한 감소를 겪었고 이는 농노 제도의 붕괴를 가속화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부족한 노동력의 수요가 높은 상황에서 더 나은 대우를 요구했고, 이는 자연스러운 임금 상승과 자유민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봉건 영주들의 권위는 약화됐고, 도시 자치권과 시민 계급이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흑사병은 종교적 신념에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 신은 이토록 많은 이들을 죽게 내버려두는가?'라는 사람들의 마음속 불신의 씨앗을 만들어냈습니다. 교회에 대한 신뢰는 약해졌으며, 일부에서는 신의 징벌이라며 자학하는 플라겔란트 운동도 벌어졌습니다.

 

  • 흑사병 그 후, 유럽은 달라졌다

흑사병은 유럽의 경제 체계, 사회 구조, 종교적 질서를 재편한 사건이었습니다. 단지 인구의 감소뿐만 아니라 인구의 붕괴를 통해 중세 봉건 질서의 위기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단지 인구의 감소가 아닌, 급격한 인구의 감소로 인구의 붕괴가 발생헀고, 봉건질서도 유지하기 힘들어 진 것입니다. 

 

그 후 수세기동안 유럽은 더 효율적인 농업 시스템을 고민했고, 이는 르네상스라는 사상적 재탄생의 밑받침이 됩니다. 어쩌면 흑사병은 잿더미 위에서 다시 태어난 유럽 문영의 '역설적 기폭제'였는지도 모릅니다. 

 

  • 우리에게 기억되는 흑사병

21세기 우리는 의학적 역사에서 또 다른 팬데믹인 코로나19를 경험했습니다. 그로 인해 급격한 사회와 인간 관계, 경제 구조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전염병은 단지 의학의 문제가 아닌, 역사적 충격입니다. 글로벌 시대 도래로 그 여파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흑사병이 남긴 흔적은 지금도 우리의 도시 구조, 의료 시스템, 사회적 연대 속에 고스란히 이어져 있습니다.

 

 

보너스 : 흑사병은 왜 유럽에서만 치명적이었을까?

흑사병은 몽골 제국의 교역망과 실코로드, 흑해 연안 항구를 통해 아시에서 유럽으로 유입되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유럽에서만 대재앙이 되었을까요? 

중세 유럽 도시의 위생이 극도로 열악했으며, 인구 밀집도가 높고, 쥐와 벼룩이 쉽게 퍼질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반면, 아시아 일부 지역은 유목 중심의 생활 방식과 더 분산된 거주 환경 덕분에 전염이 국지적 피해에 그쳤습니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낮은 강도의 전염병 경험을 통해 부분적 면역을 갖추고 비교적 일찍 발전된 위생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결국, 병의 치명성보다 사회적 대응과 환경의 차이가 전염병 대응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