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병원에가면,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혈액검사나 MRI 결과를 기반으로 치료를 받습니다. 그런데, 1,000여년 전 중세유럽에서는 과학보다는 믿음, 신학, 자연 철학이 의술을 이끌었습니다.
중세 유럽, 질병은 신의 벌이었고, 의사는 철학자이자 사제였으며, 치료는 과학과 믿음 그 사이 어디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오늘날 병원에서 당연히 여기는 청진기나 항생제는 전혀 찾을 수 없었던 혹한의 시기, 사람들은 병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저번까지 배웠던 고대의 의학에서 이제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유럽의 의사들이 사용했던 중세의 치료법에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의학의 역사에서 중세시대의 치료법은 의외로 복잡하고, 또 그만큼 흥미롭습니다.
- 피가 많다고 병이 생긴다? - 4체액설의 세계
중세 유럽 의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히포크라테스*의 '4체액설(Humorism)'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네가지 체액(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으로 그성되어 있으며, 이들 간의 균형이 건강을 좌우한다고 믿었습니다. 감기게 걸리면 점액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분노가 잦다면 황담즙이 지나치게 활발해서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또한, 혈액이 많으면 흥분과 열이, 흑담즙이 많으면 우울과 무기력이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진단뿐만아니라 치료에도 반영되었습니다. 과잉된 체액을 줄이기 위한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사혈(bloodlettin)입니다.
- 피를 빼야 낫는다 - 사혈(Bloddletting)의 시대
사혈은 중세 의학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치료였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증상을 분석한 후, 정맥을 절개하거나 거머리를 이용해 피를 뽑아냈습니다. 체내에 과도한 체액, 특히 열을 뺸다는 논리였는데, 단순한 감기부터 열병, 두통, 정신 이상에 이르기까지 사혈은 만병통치 치료법처럼 여겨졌습니다. 물론 그 병세별로 절대적으로 정해진 양은 없으며, 경험과 별자리 분석에 따라 달려져 때로는 환자가 실신할 떄 까지 피를 뽑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구토나 설사를 유도하는 약초를 사용해 불균형한 체액을 배출시키는 방식이 흔한 치료법이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위험한 치료법이란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과학적인 의술이었습니다.
- 의사는 곧 수도사이다.
증세 유럽의 병원은 대개 수도원 안에 있었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수도원 병동에서 치료를 받았고, 병을 돌보는 사람들 역시 수녀나 수도사들이었죠. 신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건 영혼의 정화였습니다. 고해성사와 기도는 치료릐 일부였으며, 병자는 죄를 씻기 위해 금식과 고행을 요구받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무지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수도사들은 기록과 관찰을 중시했고, 수도원 안에는 작은 약초 정원이 마련되어 있어서, 약초를 재배하여 다양한 연고와 차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약학이 이 시기의 전통에서 시작되었다는것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 약초, 점성술, 그리고 별자리가 알려주는 수술 날짜
약초는 중세 의학의 또 다른 중심축이었습니다. 카모마일, 라벤더, 세이지, 히솝 같은 식물들이 불면중이나 통증, 감염 치료에 사용되었습니다.이들이 가진 진정 작용이나 항염 효과는 중세에도 귀중한 치료 자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치료시기를 결정할 때는 점성술이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의사들은 달의 위치, 별자리, 환자의 생일을 조합해 수술이 가능한 날짜를 정하고, 약물 복용 시점까지 계산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당시에는 최고의 논적 치료법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이때 여성 치유자들의 역할이 컸지만, 후기로 갈수록 마녀 재판과 함께 탄압받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의사의 판단이나 진단 결과를 바탕으로 수술 일정을 잡지만, 중세에는 하늘의 움직임이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달의 위치, 별자리, 천체를 조합해 수술 날짜를 정하거나, 약초를 채취할 시간까지도 정밀하게 분석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미신이라기보다,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주론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인체의 소우주'라는 개념은 중세 의학의 철학적 배경이었고, 이 철학은 놀랍게도 현대 통합의학이나 대체치유의 개념과도 닿아있습니다.
- 중세의학, 미신인가 유산인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중세의학은 비과학적이고 비효율적인 시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질서를 만들고자 한 시도'가 존재합니다. 의사들은 단지 종교의 영향력 아래에만 있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관찰하고 기록하며, 사람을 낫게 하려는 의지를 가진 지식인에 가까웠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에게 의학은 삶과 죽음, 신앙과 자연, 논리와 믿음이 볽잡하게 얽힌 영역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의료 체계는,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쳐온 수천 년의 시간위에 서있습니다. 중세 유럽 의사들의 남긴 유산은 실패의기록보다는 '탐색의 역사'로서 의학의 역사 속 현대의 의학이 있을 수 있었던 발전의 한 조각입니다.
'의학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학의 역사] 아비센나를 만난 밤 - 천 년 전, 병원의 문을 연 사람들 (0) | 2025.04.19 |
---|---|
[의학의 역사] 약초와 마녀 사이 : 치유와 단죄가 얽힌 중세의 그림자 (0) | 2025.04.15 |
[의학의 역사] 중세 유럽을 뒤흔든 매독의 두 얼굴 (1) | 2025.04.14 |
[의학의 역사] 흑사병의 대유행, 그리고 유럽 인구의 붕괴 : 전염병이 뒤바꾼 중세의 풍경 (0) | 2025.04.13 |
[의학의 역사] 인도의 아유르베다 : 5천 년을 버틴 건강 철학의 비밀 (0) | 2025.04.12 |
[의학의 역사] 중의학의 기원 음양오행 이론의 시작 (0) | 2025.04.11 |
[의학의 역사] 히포크라테스의 등장과 ‘의학의 아버지’란 별칭의 의미 (0) | 2025.04.10 |
[의학의 역사]이집트 의학의 비밀 : 미라와 내장 제거의 숨은 의미 (0) | 2025.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