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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역사

[의학과 인종] 생물학적 편견의 그림자 의학은 중립적인가?

의학은 오랫동안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중립적 학문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생명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객관성을 추구하며 인류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학문으로 자리잡았지만, 실제 역사 속 의학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인종, 성별, 계급과 같은 사회적 요인에 따라 과학이 어떻게 권력과 결합하고 차별을 정당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의학과 인종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에서 자행된 '투스키기 매독 실험(Tuskegee Syphilis Study)'입니다. 이 실험은 1932년부터 무려 1972년까지, 즉 40년 동안 미국 공중보건국(U.S. Public Health Service)이 주도한 비윤리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연구였습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알라바마주 투스키기 지역의 저소득층 흑인 남성 약 600명을 대상으로, 매독의 '자연 경과'를 관찰하겠다는 명목으로 실험을 설계합니다. 이들 중 399명은 이미 매독에 감염된 상태였고, 나머지 201명은 대조군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연구진이 이들에게 실험의 목적이나 내용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무료 건강검진’과 ‘정부의 의료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동의를 받아냈고, 피험자들은 자신들이 단순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1940년대 들어, 페니실린이 매독 치료제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진은 해당 약을 이들에게 고의로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부 환자가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하자, 이를 막기 위해 다른 의료기관에 해당 인물들이 ‘임상시험 중’이라는 공문까지 발송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참가자들이 치료 기회를 박탈당한 채 병을 악화시켰고, 수십 년에 걸쳐 사망, 불임, 태아 감염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됩니다.

이 실험의 목적은 명백히 인종차별적인 과학적 호기심에 기반했습니다. ‘흑인 남성에게서 매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관찰하겠다’는 전제 자체가, 특정 인종을 마치 실험동물처럼 대하는 태도를 반영합니다. 이는 과학이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고, 사회적 권력을 가진 집단에 의해 선택적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투스키기 실험은 1972년 언론에 의해 폭로되면서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고, 그 여파로 대대적인 의료윤리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벨몬트 보고서(Belmont Report)와 같은 윤리 지침이 제정되고, 피험자의 알 권리, 자율성, 동의 절차를 명문화하는 기준이 마련되었습니다. 동시에 인종과 사회경제적 배경이 의료 접근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이후의 공공 보건 정책 수립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오류로만 치부될 수 없습니다. 투스키기 실험은 오늘날에도 반복될 수 있는 ‘차별적 의학의 구조’를 경고하며, 의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례로 계속해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과학은 도구일 뿐, 그 도구를 어떻게 쓰느냐는 인간의 윤리와 구조적 인식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전학의 발전이 낳은 민족 질병 담론의 왜곡

20세기 중반 이후 유전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질병의 원인을 유전자 수준에서 설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종’과 ‘질병’ 사이에 생물학적 연결 고리를 설정하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이는 새로운 형태의 편견을 만들어냈습니다. 예를 들어, 낫형 적혈구 빈혈(sickle cell anemia)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흔히 나타나는 유전질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환은 말라리아가 유행하던 지역의 생존 전략으로 발생한 유전자 변이이며, 인종 자체가 질병의 원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부 연구나 의료 실무에서는 여전히 “흑인은 낫형 적혈구 빈혈에 취약하다”는 식의 생물학적 고정관념이 존재하며, 이는 진단의 왜곡과 오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유전적 질병이 특정 민족에 집중된다는 설명은 쉽게 사회경제적 맥락을 무시하게 만듭니다. 예컨대 일부 질환의 발생률은 생활환경, 영양, 의료 접근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전자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 순간 사회구조적 문제는 은폐되기 쉽습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지속되는 인종·젠더 편향

문제는 이러한 편향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날에도 임상시험의 인구 구성 불균형, 의료기기 개발에서의 인종 편향, 의사들의 무의식적 차별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러한 편향은 단지 통계나 과학적 문제가 아니라, 누가 의학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선택하는가라는 구조적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정상인’으로 간주되는 인종, 성별, 신체 조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임상시험: 많은 신약 임상시험이 주로 백인 남성을 대상으로 설계되며, 다른 인종이나 여성, 노인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실제 치료 효과나 부작용이 해당 집단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 의료 알고리즘: 최근 미국에서는 AI 기반 진료 도구가 흑인 환자에게 진료 우선순위를 낮게 부여한 사례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알고리즘이 학습한 데이터 자체에 인종차별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객관적 시스템’이라는 환상에 의문을 던집니다.
  • 젠더 편향: 여성은 심근경색이나 통증의 표현 방식이 남성과 다르지만, 의료진은 이를 과소평가하거나 ‘심리적 문제’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질병 진단과 치료의 지연으로 이어지고,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료를 정상으로 부를 것인가 고민해야합니다. 의학의 목표는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누구인지, 어떤 몸이 기준이 되는지에 따라 그 치료의 범위와 내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상값’이라는 말은 실제로는 특정 인종과 성별의 평균치에 불과하며, 이를 일반화하면 나머지 집단은 ‘예외’가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현대 의학은 단순히 데이터와 기술을 축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설계되었는지, 누가 배제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는 의료의 윤리를 넘어서, 과학의 정의로 이어지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공정한 의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의학은 결코 사회와 분리된 순수한 과학이 아닙니다. 인종, 계급, 젠더, 문화가 모두 의학을 구성하는 요소이며, 때로는 치료의 기회조차 이 요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치료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진단은 누구를 기준으로 한 것인가?"

 

공정한 의료는 완벽한 기술보다 더 나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놓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몸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진료실을 만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