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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역사

생리학의 역사: 살아있는 몸을 이해하려는 여정

고대 그리스의 체액설부터 현대 신경전달물질에 이르기까지, 인체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탐색해온 생리학의 여정은 의학과 생명과학의 근간을 이룬다. 본문에서는 호르몬, 자율신경계, 내분비학의 발전사까지 폭넓게 조명한다.

 

의학의 역사 생리학의 역사

생리학의 시작: ‘네 가지 체액’이 말해준 몸의 균형

인류가 인체의 기능을 본격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시도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몸이 네 가지 체액의 조화로 유지된다고 보았습니다. 이 체액들은 각각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경우 질병이 발생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단순한 미신적 믿음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이성과 철학을 바탕으로 정립된 이론이었습니다. 이후 로마 제국의 명의 갈레노스에 의해 더욱 체계화된 체액설은 무려 천 년 이상 서양 의학의 기준으로 군림하며, 병의 원인뿐만 아니라 성격 유형까지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비록 오늘날에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는 생리학의 역사에서 최초로 인체 내의 '내적 균형' 개념을 제시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해부학에서 생리학으로: 정지된 몸에서 살아 움직이는 몸으로

중세 말과 르네상스를 거치며 유럽 사회는 종교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로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해부학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대표적으로 베살리우스의 인체 해부학서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는 해부학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체 구조를 밝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자들은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기능하는가’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생리학으로 이어졌습니다. 17세기 윌리엄 하비는 해부와 실험을 통해 심장이 혈액을 전신으로 순환시킨다는 이론을 증명하였고, 이는 당시까지 당연하게 여겨지던 ‘간이 혈액을 만들어 전신으로 보내는 구조’라는 갈레노스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결과였습니다. 하비의 연구는 과학적 실험의 중요성을 각인시켰고, 생리학을 해부학과 구별되는 독립적 학문으로 부각시켰습니다. 이때부터 생리학은 단순한 관찰이 아닌, 증거 기반의 과학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자율신경계와 생리학 실험의 정교화

19세기는 생리학이 본격적인 과학적 학문으로 자리를 잡은 시기였습니다. 산업혁명은 정밀기기와 실험 장비의 발전을 이끌었고, 이로 인해 보다 정교하고 반복 가능한 생리학 연구가 가능해졌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프랑스의 클로드 베르나르가 있습니다. 그는 생리학에서 ‘내부 환경’(milieu intérieur), 즉 인체 내부의 항상성을 최초로 언급했습니다. 그는 “외부 환경이 변화하더라도 내부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능력이 생명을 유지하는 핵심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개념은 훗날 ‘항상성(Homeostasis)’으로 정식화되어 현대 생리학의 핵심 개념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자율신경계에 대한 연구도 급격히 진전되었습니다. 자율신경계는 뇌의 직접적인 통제 없이도 심장박동, 소화, 호흡 등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을 조절하는 시스템입니다. 교감신경은 긴장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작동하며, 부교감신경은 이완과 회복을 담당합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조절 체계는 인체의 균형 유지와 빠른 환경 적응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내분비계의 발견: 호르몬이라는 보이지 않는 언어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생리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내분비샘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 즉 호르몬의 발견은 인간의 생리 작용이 신경뿐 아니라 화학적인 방식으로도 조절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호르몬은 혈액을 통해 온몸으로 퍼지며, 각 장기에 신호를 전달합니다. 최초로 발견된 호르몬은 ‘세크레틴’이었습니다. 1902년 베일리스와 스타링은 소장에서 분비되는 이 물질이 췌장의 소화효소 분비를 자극한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는 생리학에 있어 신경 전달과는 다른 새로운 조절 메커니즘의 등장을 의미했습니다.

 

이후 인슐린, 티록신, 아드레날린, 에스트로겐 등 다양한 호르몬이 차례로 발견되면서, 내분비학이라는 새로운 세부 분야가 독립하게 됩니다. 호르몬의 작용 메커니즘은 성장, 생식, 혈당 조절, 감정 변화, 수면 등 광범위한 인체 기능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이후 정신의학, 내과학, 내분비질환 치료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경전달물질의 발견과 뇌의 새로운 이해

20세기 중반, 생리학의 중심은 다시 한 번 이동합니다. 이번에는 뇌와 신경계가 중심이었습니다. 생리학자들은 뇌세포가 서로 어떻게 정보를 주고받는지, 전기 신호 외에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연구했고, 그 결과 아세틸콜린이라는 첫 번째 신경전달물질이 밝혀졌습니다. 이후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등 다양한 신경전달물질이 차례로 발견되었으며, 이들은 각각 운동 조절, 집중력, 감정 조절 등 특정 뇌기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신경전달물질의 발견은 단순히 생리학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의 감정, 기억, 학습 능력, 정신질환 등 복잡한 인지와 행동의 기초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신경과학, 심리학, 정신의학의 발전으로 이어지며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치며: 생리학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다리

생리학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는 과학의 여정이었습니다. 혈액의 흐름, 호르몬의 신호, 신경의 전기적 전달, 내분비선의 화학적 분비이 모든 과정은 우리가 겉으로는 볼 수 없는 인체 내부의 질서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생리학은 유전자 연구, 인공지능 기반 분석, 신경 인터페이스 기술과도 결합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여전히 ‘살아 있는 몸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집념’에 있습니다. 의학과 생명과학의 뿌리를 알고 싶다면, 생리학의 역사를 마주하는 것이 그 시작입니다. 이 여정은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데 필요한 가장 확실한 단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