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이전까지 여성의 몸은 의학의 주류 영역에서 배제되거나, 신비와 수치심 속에 가려진 채 다루어졌습니다. 특히 출산과 생리는 신의 영역 혹은 여성 고유의 신체적 결핍으로 해석되며, 과학적 분석보다는 종교적 ·문화적 금기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산부인과의 역사는 단순히 한 전문 진료과목의 탄생을 넘어,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인신과 의학적 권한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서사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의학의 역사에서는 오늘까지의 의료시스템 속에서 여성의 몸이 어떻게 대상화되었고, 또 어떻게 주체적인 회복의 길을 걸어왔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 고대부터 중세까지 : 신의 영역으로서의 여성의 몸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생식은 주술적이며 신비로운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히포크라테스 학파조차 여성의 자궁을 '떠다니는 자궁(floating wob)'라고 표현하며, 여성의 질환 대부분을 자궁의 위치 이동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이후 수백 년 동안 '히스테리'의 어원으로 작용하며 여성의 정신질환을 신체에 기인한 것으로 본 근거가 되었습니다.
특히 생리는 당시 사회에서 불가사의하고 두려운 현상으로 여겨졌습니다. 히브리 율법에서는 생리 중인 여성을 부정한 존재로 간주하고 격리했으며, 이는 종교적 정결 규범의 일부로 기능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생리를 '과잉된 체액의 배출'로 해석하며 여성의 감정 기복이나 불안정성을 설명하는 근거로 삼았고, 로마에서는 생리혈이 금속이나 작물에 해를 끼친다는 미신이 널리 퍼졌습니다. 중세에 이르러 생리는 '원죄의 상징'으로 해석되어, 여성의 몸 전체가 죄와 정화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여성의 몸 전체가 죄와 정화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생리와 관련한 오해와 낙인을 오랫동안 유지시키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교회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여성의 신체는 죄의 근원으로 간주되어, 해부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출산은 여성만이 수행할 수 있는 '여성의 일'로 남았지만, 동시에 생명의 탄생을 둘러싼 의학적 접근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조산사들은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나, 의학적 권위는 없었고, 심지어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 근대 의학과 남성 중심의 출산 관여
18세기부터 해부학과 생리학이 발달하면서 여성의 몸은 점차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여성 스스로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남성 의사들이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산과학(obstetrics)의 발전은 여성의 출산을 조산사에서 남성 의사로 옮겨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곧 의학이 여성의 출산 경험에 개입하며 통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19세기에는 병원 출산이 증가하면서 위생적 조치가 강조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산욕열로 인한 사망률은 매우 높았습니다. 남성 의사들이 해부실과 분만실을 오가며 손을 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오스트리아의 이그나츠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는 손 씻기의 중요성을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오랜 시간 외면당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산과와 부인과가 분리되며 오늘날 산부인과의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산부인과는 여성의 목소리를 반영하기보다는, 여성의 몸을 '연구 대상'으로만 다루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진료실에서 여성의 피진단자일 뿐, 자신의 몸에 대해 설명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19세기 미국에서 제임스 마리온 심스(J.Marion sims)가 노예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마취 없이 산부인과 수술을 시행하며 의학적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이름은 '산부인과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 이면에는 여성의 고통과 인권 침해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 여성의 의학 진입과 목소리의 회복
20세기 들어 여성 의사와 간호사들이 의학계에 점차 진입하면서, 여성의 몸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었습니다. 생리, 피임, 폐경 등 그동안 수치스럽게 여겨졌던 주제들이 점차 공개적인 논의의 장으로 나왔고, 여성 건강에 대한 종합적인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여성주의 운동은 의학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또 하나의 분기점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우리몸, 우리자신(Our Bodeies, Ourselves)'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여성의 몸을 타자화하지 않고, 스스로를 이해하고 돌보는 주체로 바라볼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 책은 1971년 미국 보스턴 여성 건강책임그룹이 주도해 만든 책으로,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돌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실천적 안내서였습니다. 이 책은 당시 의학계가 여성의 몸에 대해 일방적으로 설명하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실제 여성들의 경험과 목소리를 기반으로 내용을 구성했습니다. 책은 생리, 피임, 출산, 낙태, 성 건강, 폐경 등 민감하지만 중요한 주제를 자세하고 솔직하게 다루었고, 여성 독자들이 스스로 정보를 판단할 수 있도록 과학적 근거와 함께 다양한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또한 의료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며, 환자로서의 여성의 권리와 의료진과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했습니다. 우리몸 우리자신은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여성 건강 담론을 대중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 현대 산부인과와 여성의 건강권
오늘날 산부인과는 단순히 출산을 돕는 과를 넘어, 전 생애주기의 여성 건강을 포괄하는 분야로 확장되었습니다. 생식 건강, 성 건강, 유방 질환, 호르몬 치료, 갱년기 관리 등 다양한 진료 항목이 마련되었고, 여성 중심 진료 시스템 구축을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있습니다. 산부인과 진료에 대한 불안감, 비공감적 의료행위, 환자 경험이 배제되는 구조 등은 여전히 많은 여성에게 장벽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비혼 여성이나 청소년, 성소수자 여성은 접근성에서 더욱 많은 제약을 겪고 있습니다.
산부인과의 역사는 단순히 의료 기술의 발전사를 넘어, 여성의 몸이 어떻게 이해되고 재해석되어왔는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사이기도 합니다. 고통과 침묵, 배제의 역사를 지나 이제는 스스로 말하고 선택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중심에 두는 것이 오늘날 산부인과의 과제이며, 의학이 진정한 의미의 회복과 돌봄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여성의 몸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수치심이 대상이 아닌 존중해야 할 생명의 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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